
•한국능률협회 전문위원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시황제의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했다. 천 년을 갈 것 같았던 진나라는 불과 몇십 년 만에 무너졌다. 시황제의 철권 통치도 문제였지만, 이사와 조고 등의 간신에게 휘둘린 우매한 군주 ‘호해’의 무능이 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천하는 다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이때가 기원전 3세기 무렵이다. 그 정점은 기원전 209년에 일어난 ‘농민의 반란’, 진승과 오광의 난이었다. 이는 권력에 대항한 민중의 봉기였다.
진승과 오광은 세력을 결집해 천하를 잠시 흔들었지만, 이들에게는 체계적인 전략과 농민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리더십이 부족했다. 각지의 제후들과 진나라 통일 이전 천하의 주인이었던 6국 출신의 귀족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때 강동 지역에서 ‘항량’이 군사를 모았다. 항량은 진나라가 천하 통일을 하기 전 강국이었던 초나라의 명장 ‘항연’의 아들이었다. 항량의 곁에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조카 ‘항우’가 있었다.
‘항우’는 기원전 232년에 하상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항량의 손에서 자랐다. 항우는 키가 8척이나 되고, 기골이 장대하며 모든 병법과 무술에 통달한 타고난 무인이었다.
항우는 회계 태수 ‘은통’을 죽이고 강동의 자제들로 구성된 정예병 8,000명을 모았다. 이들이 ‘항량’ 부대의 주력군이었다. 항량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당시 진나라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10여 무리가 넘었으며, 그중 가장 큰 세력은 항량이 지휘하는 부대였다.
각지의 군소 부대들이 속속 항량에게 합류했고, 이들 중에는 유방도 있었다. 항량은 진나라 대항 세력의 리더가 되었다. 항량은 지략가 ‘범증’의 건의를 받아들여 초나라 왕실의 후예를 찾았다.
양치기를 하고 있던 초나라 왕가의 후손 ‘옹심’을 찾아내어 그를 초 ‘회왕’으로 추대했다. ‘회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민심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었다. 항량은 세상을 향해 창칼을 높이 세울 명분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208년, 항량은 진나라 명장 장한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기원전 207년, 진나라 군대와 맞서야 했지만 무려 50만 명의 대군이라 전멸을 각오하지 않는 한 대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항우가 나섰다. 그는 10만 명을 이끌고 진나라 ‘왕리’의 부대와 정면 대결을 펼쳤다. 항우는 배수진(파부침주: 破釜沈舟)을 쳤다. 뒤에는 강물이 흐르고, 앞에는 진나라 대장군 ‘왕리’의 대군이 버티고 있었다. 어차피 후퇴해도 강물에 빠져 죽을 신세가 되자 초나라 군은 일당백의 힘을 냈다.
항우는 맨 앞에서 창칼을 휘두르며 진나라 진영을 휩쓸었다. 항우의 대승이었다. ‘왕리’를 생포했고, 항복한 진나라 군을 받아들여 항우는 이제 40만 대군을 휘하에 두게 되었다. 항우는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했다.
항우는 함양을 점령하고 승전 잔치를 성대하게 벌였다. 진나라의 온갖 금은보화를 손에 넣고, 궁궐은 불태워 버렸다. 훗날 사마천은 <사기>에 “당시 함양의 궁궐은 무려 3개월이나 불길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온갖 재물과 아녀자를 포로로 잡아 팽성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진나라의 찬란한 역사를 모조리 불태우며 함양성을 초토화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항우는 또 다른 실수를 저질렀다. 항우에게 투항한 진나라 황제 ‘자영’을 살해한 것이다.
비록 망한 왕조의 명목뿐인 황제였지만, 당시의 예법상 황제를 죽이는 것은 역적이 될 각오가 필요했다. 천하의 인심은 직접 손에 피를 묻힌 항우를 비난했고, 민심은 그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버린 상태였다. “초왕, 이번에는 강남으로 몸을 숨겨야 합니다. 그런 후에 다시 군사를 모으고 힘을 비축하면 천하를 건 싸움을 다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내가 처음 거병을 했을 때 강남의 자제들 8,000명을 이끌었다. 이제 그들을 모두 잃고 26명만 살아 돌아간다. 설사 백성들이 나를 용서해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항우는 혼자 남고 부하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애첩인 우희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장렬하게 자결했다.
“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
시불리혜추불서(時不利兮離不逝)
추불서혜가내하(雕不逝兮可奈何)
내가 힘을 쓰면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노라, 불운하여 명마마저 달릴 줄 모르네, 명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 거냐, 우희여, 우희여 너를 장차 어찌할꼬.”
그리고 우희의 목을 베어 자신의 말에 달고 단기로 한나라 대군 속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유방 군을 죽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의 숫자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초나라의 명문가 자손으로 무술과 용맹에서 천하에 적수가 없었던 항우는 죽어서 시신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가 기원전 202년으로, 항우의 나이는 불과 31세였다.
그가 결국 패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부하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독선과 독단, 독주의 3독(三獨)으로 의사 결정을 내려 부하들의 배반을 자초한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자만, 오만, 교만, 3만(三慢)의 태도로 측근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은 탓이다. 항우는 천하의 영웅이었다. 그의 휘하에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명장들이 즐비했고, 군사로는 제갈량급의 ‘범증’, ‘항백’과 ‘진평’이 있었다.
하지만 항우는 그들도 믿지 못했다. 항우가 ‘아부(亞父)’라고 의지하고 따랐던 ‘범증’마저 믿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은 더욱 신뢰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항우가 ‘범증’을 끝까지 믿고 썼다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항우는 의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너무 잔인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 특히 처음 거병 때부터 자신을 따랐던 강동의 8,000명 정예병은 무척 아꼈지만, 자신에게 투항한 병사들은 믿지 않았다.
진나라에서 투항한 20만 명의 병사들이 반란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모조리 생매장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항우의 행동은 그와 대결하는 적군에게 ‘어차피 항우에게 잡혀도 죽을 것이 뻔하다’는 마음으로 결사항전 의지를 키웠을 뿐이었다.
항우는 전리품을 논공행상이 아닌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지급하는 실수도 범했다. “믿지 못하면 쓰지 말고 이왕 썼으면 철저히 믿어라.” 이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절대 덕목이다.
먼저 믿지 않으면 상대도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이 잊지 말아야 할 리더십의 원칙이다. 항우는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리더십에서는 실패했고 공정하지 못한 조정자가 되어 실패한 것이다.
항우는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8년이 지나는 동안 70여 회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모든 싸움에서 이겼으니, 천하가 이제는 나를 제대로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자뻑’ 수준의 자기 과시에 자만심, 공명심이 극에 달했다.
자만심에 사로잡히면 오만하고 교만해진다. 리더에게는 이는 치명적이다. 그는 우선 듣지 않는다. 모든 결정을 혼자서 하고, 그것이 계속되면 인재는 자연스럽게 그런 리더를 떠나게 된다.
‘1등급 리더는 2등급 참모가 필요하고, 2등급 리더는 1등급 참모가 모인다’는 말을 항우는 깨우치지 못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항우는 힘으로 천하를 경영하려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죽는 순간까지 천하제일의 무용을 과시했지만, 이는 필부의 용맹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항우는 해하에서 죽으면서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다”고 운명을 탓했지만, 그의 패인은 강한 자존심, 급하고 잔인한 성격에다, 3독(三獨)과 3만(三慢)에 빠져 자신의 재능만 최고라고 생각한 품성 탓이라 할 수 있다.
한비자는 군주의 등급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하급인 ‘하군(下君)’은 오로지 자신의 힘과 지혜만을 발휘하고, 중급인 ‘중군(中君)’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하고, 상급인 ‘상군(上君)’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혜를 발휘하게 한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군주인 ‘명군(名君)’은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기 위해 개개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경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마천은 항우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투현질능(妬賢嫉能)이라는 감정적인 요인을 제시했다. 이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한다는 뜻으로, 항우가 뛰어난 참모를 질투한 나머지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한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본 것이다.
항우는 리더로서 수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의심과 불통의 리더십으로 역사의 패자로 기록되었다. 동서고금을 통해 우리는 계속 배우게 된다. 3독과 3만은 스스로를 망치고, 조직까지 망하게 하는 소인배의 행동으로 귀결된다.

최승훈
•한국능률협회 전문위원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사이에듀 평생교육원 교수
•한국 생애설계연구소 소장
•한국 생애설계포럼 대표(경영지도사, 평생교육사, 생애설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