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상불(商佛) 임상옥과 상도(商道) 
[최승훈 소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상불(商佛) 임상옥과 상도(商道)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4.05.23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승훈
•한국능률협회 전문위원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무쌍하게 변화하는 기업과 사회환경에 대응하며 어려워진 경영활동을 잘 해내시는 모든 분들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최근에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경영자로 손꼽히는 조선의 거상 임상옥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상도’와 ‘드라마 상도’를 다시 보게 되었다.

4대에 걸쳐서 사신을 따라다니던 가난한 역관의 후예로 태어났던 비천한 신분의 임상옥이지만 그는 조선의 최고의 거상이 되었다. 엄청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마침내 ‘상업의 도(商道)’를 깨달아서 ‘상업의 부처(商佛)’라는 공명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인생을 따라가 보면서 200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지금 시대에도 절대로 필요한 경영자의 자질과 풍모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임상옥은 재벌 총수라 할 수 있다.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면서 상인(업)을 업신여겼던 조선 시대에 최고의 거부가 되고 공(功)을 세워 벼슬에도 올랐으며, 부(富)를 대대로 물려주어 일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도 힘든 사회 환원으로 신분을 뛰어넘어 성공한 경영자 임상옥은 조선 후기시대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왜 그를 ‘상불(商佛)’이라고 하는지 그가 어떻게 ‘상업의 부처’라고 불리고, 평생토록 지켰던 ‘상업의 도(商道)’는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이미지 : 다음>
 <이미지 : 다음>

임상옥(林尙沃)은 1779년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생으로 본관 전주(全州). 자는 경약(景若). 호는 가포(稼圃)이며, 정조 20년(1796)부터 장사를 시작하여, 순조 10년(1810) 이조판서 박종경(朴宗慶) 대감을 설득해서 그의 정치적 배경을 활용하여 조선 최초로 국경지대 인삼무역권을 독점하고, 천재적인 상술을 발휘하기에 이른다. 

1821년 변무사(辨誣使:조선 시대, 중국에서 조선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는 일이 있을 때, 이를 밝히기 위해 임시로 중국에 보내던 사절)를 수행, 청나라에 갔을 때는 연경(北京) 상인의 인삼 불매동맹(不買同盟)을 교묘하게 깨뜨리고 원가의 수 배나 높은 가격으로 팔아 막대한 재화(財貨)를 벌어들였다. 

조선 예산의 30% 정도를 벌어들인 재화로 기민(飢民)과 수재민을 구제하고 여러 가지 사회공헌을 인정받아 순조 32년(1832)에 곽산군수(郭山郡守), 순조 35년(1835)에 구성부사(龜城府使)에 발탁되어 발군(拔群)의 실력으로 정사를 다스려 맡은 고을의 가난을 구제하고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들기도 했다. 

은퇴 후 빈민구제와 시와 풍유(風流)로 삶을 즐기며 주변 고을 사람들의 부채를 모두 탕감해 주고 청부(淸富)로 여생을 보내다가 1855년생을 마감하였다.

상즉인(相卽人)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며, 사람과의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라는 것을 만상 ‘홍득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상도(장사의 道)’로 승화시켜, 평생동안, 실천하고 지킨 것이 그를 상불(商佛)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원천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중국 약종상으로부터 쾌척 받은 천은 200냥으로 만상에서 독립할 수도 있었으나(자기가 받은 돈이지만 공금) 그 돈을 모두 털어 아버지 술빚에 팔려 온 한 여인의 생명을 구해내었다. 

그로 인해 만상에서 퇴출당하기도 했다. 의로운 일은 크건 작건 그냥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실증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임상옥이 연경의 유곽에서 구해준 장미령이라는 여인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기사회생하여 연경(북경)의 대부 정실부인이 되어 엄청난 힘을 실어 주었다.

그의 훌륭한 스승이자 멘토인 ‘석숭’ 스님이 그에게 던진 메시지, 사람의 손에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칼’이 들어 있는데, 그 손으로 이익보다 옳은 일과 의(義)를 쫓으라는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고 실천하여, 오로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칼’로 주변 사람을 무수히 살려내기도 헸다. 
 
그는 스승 ‘석숭 스님’으로부터 위기 대처 비결 세 가지를 받아 닥쳐온 세 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위기는 죽을 사(死)자로 두 번째 위기는 솥 정(鼎)자로 세 번째 위기는 ‘계영배(계盈盃)’로 대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첫 번째 위기는 연경에서 평상시 ‘인삼 1근당 은자 90냥’을 받던 것을 160냥 까지 올려서 조선 홍삼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으나, 이로 인해 임상옥의 인삼은 불매운동에 들어가게 되고 임상옥의 운명은 끝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죽을 사(死)자를 생각하며 소신공양의 배짱으로 인삼을 불태움으로써 가져간 1만 3천 근의 홍삼을 200냥에 모두 처분하는 진기록을 세워 조선 최고의 갑부로 우뚝 서게 되었다. 

두 번째 위기는 혁명가 홍경래가 혁명에 참여하지 않으면 목숨을 거두겠다 했을 때, 솥 정(鼎)자로 위기에 대처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권력, 명예, 재물의 세 가지 욕망이 있는데 그는 이미 ‘재물’과 ‘명예’와 적당한 ‘권력’을 이룬 사람이었다. 

솥발 세 개로 ‘재물’ ‘명예’ ‘권력’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솥이 넘어지는 이치를 설명하며 일부러 청동 솥의 다리 하나를 부러뜨려 홍경래 앞에 쓰러뜨리면서 설득하여 멸문지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 번째 위기는 “계영기원 여이동사(戒盈祈願 與爾同死‘, 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너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의 비밀을 간직한 계영배의 의미를 찾아내었다. 

계영배는 평범한 잔에 불과하지만, 가득 채우면 몽땅 사라지고 7부 정도만 채우면 남아 있는 신기한 술잔이었다. 언제나 7부에 만족하는 삶으로 세상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미지 : 다음>
<이미지 : 다음>

오늘날 위기관리 능력은 개인이나 조직경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평가받는데 임상옥은 그것을 세 가지의 실천으로 ’위대한 상인(商人)‘으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상옥은 부의 축적과 그 부를 사회에 환원한 공으로 관직까지 얻게 되어 양반으로 신분마저 상승하게 되는데, ”권력, 명예, 재물“을 독식하거나 더 가지려 하면, 균형이 깨어져 망하게 되니 솥의 세 발처럼 자신의 만족(滿足), 즉 자족(自足)을 추구한 상인이었다. 

그는 "어차피 빚이란 것도 물에 불과한 것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어찌 받을 빚이요, 갚을 빚이라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며 함께 장사하던 작은 상인들과 주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상인으로서 성공을 거둘 수가 없었을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 물건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에 불과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임상옥은 자신에게 빚을 진 모든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거액을 들여 다리와 도로를 만들어 교통의 편익을 제공하고, 1천 석이 넘는 쌀을 산성 수비에 쓰도록 희사하는 등 구민과 공익사업에 많은 재산을 투자하였다. 

임상옥은 조선 후기의 상인 층을 대변하는, 그의 역할만으로도 입지전적이고 선각자적인 인물이었다. 

  <이미지 : 다음>
  <이미지 : 다음>

상도에 담긴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즉 ’재물은 평등하고 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하고, 사람은 심중이 바르고 곧기가 저울과 같이 반듯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두고두고 기억해야 될 교훈이라 하겠다.

‘소설 상도’의 일독이나 ‘드라마 상도’ 시청을 권하고 싶다.

최승훈 
 •한국능률협회 전문위원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사이에듀 평생교육원 교수
 •한국 생애설계연구소 소장 
 •한국 생애설계포럼 대표(경영지도사, 평생교육사, 생애설계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