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추사(秋史) 김정희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저는 그림 같은 멋진 글씨 추사체가 떠오릅니다. 즉 천자문을 만든 한석봉처럼 추사제를 만들어낸 서예가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보통 분이 아니더군요. 먼저 집안이 왕의 종친과 외척이었다. 증조부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지며, 영조가 증조부에게 하사한 집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서울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에서 자란다.
추사의 아버지도 병조판서를 지내신 분이고, 스승 박제가(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한테 글을 배우게 됩니다.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의 1인자인 박제가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는 중국으로 가는 외교사절이었던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서 2명의 중국인 거유(巨儒)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는데 이들은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과 완원이었다.
김정희는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최고조에 이른 고증학의 진수를 공부하였고, 중국 제일의 金石學者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 제일”이라 찬탄했으며, 완원으로부터는 阮堂이라는 애정 어린 아호를 받기도 한다.
즉, 연경에서 이들을 만나 학문상의 일대 전환을 이루게 되고, 당시 대륙에서 질풍노도처럼 일고 있던 실학과도 접할 수 있었다.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고, 50세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추사가 무슨 사연으로 제주로 9년간이나 유배를 가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도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인 제주로로 위리안치(가시나무로 집 주위를 둘러 집 밖으로 출입을 제한한 유배형벌)된다 말인가?
육지에서 1000리, 바다로 1000리로 가는 데만 한 달 걸리는 유배길이 당시 55세였던 추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특히 억울함에 치를 떨었으리라. 게다가 역적들이 언제 왕을 사주해 사약이 내릴지 몰라 불안했으리라.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하며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고, 특히 유배 기간 중 부인과 며느리 등과 주고받은 40통에 달하는 한글 편지는 그의 인간적 면모 드러내고 있다.
제주도 유배기간을 통해서도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최고의 걸작품인 ‘세한도’도 이 시기에 그려졌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세한도(국보 180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제주에서 5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59세의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했던 작품으로 추사가 직접 쓴 제작 동기와 작품의 의미를 적은 발문이 있다.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귀한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 주었도다.”라고 쓰며 공자의 말도 덧붙였다.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후 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완당이 낙관으로 사용했던 문구가 장무상망(長母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스승으로부터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자신이 교류해 왔던 청나라 문사들에게 세한도를 보여주며 당시 청나라 최고의 문인 16명으로부터 글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초대부통령 이시영, 위당 정인보, 오세창의 발문까지 더해져 총 길이가 16m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추사체는 한자를 통달하고, 상형문자를 꿰뚫은 그가 한 자 한 자 무한한 자유를 주되, 전체를 벗어나지 않고 강약의 힘을 보여준 글씨로, 규격화된 글씨만 고집하던 조선에 반향을 일으켰다.
게다가 글자 크기도 다르고, 구도 마저도 대담하다. 글씨를 그림처럼, 그림을 글씨처럼 표현한 추사체를 완성하기까지 붓 1000자루가 닳았고, 벼루 10개가 구명이 뚫렸다고 한다.
추사가 살아 생전 마지막으로 쓴 현판을 보려면 서울시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에 가면 볼 수 있다. 불교경판을 보존하기 위한 판전(板殿)에 걸려있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말년작으로 유명하다. 추사는 판전의 글씨를 쓰고 3일 후 사망했다.
황규만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회장
(사)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부회장
(사)푸른아시아(기후위기 대응 NGO 환경단체)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