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비가 조조 아래 머물 무렵. 조조는 천하의 인걸인 유비를 경계하고, 유비는 한술 더 떠 조조를 없애려는 음모에 가담할 때였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조조가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사군(유비)과 나뿐이오. 본초(원소) 따위는 이야기할 것도 못 되오.”
이 말에 유비는 조조가 무언가 눈치챘다는 생각에 손이 떨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유비는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빠져나갔고, 나중에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가 든 조조는 사람을 보내 그의 동태를 살핀다. 이때 유비는 마당에서 하인이 파를 반듯하게 뽑지 못한다고 지팡이로 때리는 소인배 같은 면모를 보여 의심을 피한다. 삼국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다.
위·촉·오 세 나라가 솥발처럼 나란히 정립(鼎立)했던 중국의 삼국 시대는 오늘날까지 숱한 창작과 해석의 무대로 등장한다. 후한 말, 백 년 남짓한 혼란기가 인간과 역사의 본령을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으로 회자되는 바탕에는 바로 강대한 조조의 세력에 끝까지 맞섰던 유비가 있다.
장쭤야오의 『유비 평전』은 거듭되는 역경 속에서 단 한 번도 의지를 꺾지 않았던 유비의 정신적 면모에 주목한다. 한나라 황실의 먼 후손이지만 혈혈단신으로 출발한 유비는 일생을 통틀어 승리보다 패배를 더 많이 겪었다. 그러나 식객으로 다른 군웅들 휘하를 전전하면서도 결코 안주하지 않았으니, 예순이 넘은 나이에 마침내 스스로 촉한의 황제에 오르게 된다.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기 전 “요즘 말을 타지 않아 넓적다리에 살이 올랐다.”라 한탄하던 유비,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가 평한바 ‘백절불요(百折不撓)’, 즉 좌절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은 유비의 정신이야말로 어려운 시대를 극복한 가장 큰 자산이었다.
덕 있는 군주는 외롭지 않다
유비가 조조와 완전히 갈라선 뒤의 일이다. 조조의 압박으로 후퇴하는 유비가 양양을 지나갈 때 조조에게 투항하기를 바라지 않는 10만 백성이 따라나섰다. 커다란 짐을 바리바리 싸 든 탓에 행군이 지체되는데 조조의 정예 기병 5000명이 바짝 쫓아오는 상황. 사람들을 버리고 서둘러 피신하라는 측근의 권유에 유비는 말한다.
“큰일을 하려면 반드시 사람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데 어떻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전략적 실책이라 평해 마땅하나, 중국사에서 극히 드문 결단을 보여 주는 이 일화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수많은 인구가 나고 죽은 광활한 대륙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며 때로 숙청과 학살을 자행했던 중국의 역대 군주들 가운데 유비처럼 인간을 중시한 지도자는 없기 때문이다.
유비의 곁에는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도모할 수 있는’ 인재가 많았다. 희대의 장수인 관우와 장비, 위대한 정치가 제갈량이 보필했으며 명장 조운과 방통이 재능을 바쳤다.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유명한 고사에서 보듯 유비가 필요한 사람에게 성심을 다해 도움을 청했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과감히 일을 맡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수하로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가 왔음에도 기어이 뿌리치고 돌아왔고, 제갈량은 유비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뜻을 이어 대업을 이루고자 몸 바쳐 일했다.
유비의 용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장송은 유비가 촉 땅에 들어가는 데 기여한 핵심 인물로, 키가 작고 지조가 없으나 재주가 뛰어났다. 처음 그는 조조 아래에서 일하고자 했는데,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조조는 장송의 생김새가 볼품없어 예우하지 않았다. 분노한 장송은 조조와 등을 돌리고 유비 편에 협력하게 된다. 유비는 장송에게 은혜를 베풀고 진심으로 대우해 촉 땅의 상세한 정보를 얻어 냈다. ‘용인술의 대가’ 조조가 저지른 크나큰 실책으로 전하는 이 사건은 유비의 인재 기용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람을 정성껏 대한 유비는 마음으로 서로 통하는 결과를 거두었으니, 무명의 병사들까지도 그에 호응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란 쉽지 않다. 나의 마음을 써서 그의 마음을 얻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타인에게 손을 뻗는 까닭은 끝내 나 혼자 채울 수 없는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산 너머 산과 같은 난관을 헤쳐 나가다 보면, 홀로 추스르며 버텨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구호가 울려 퍼질지언정 같이 걸어갈 동행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비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서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남의 도움으로 채웠다. 위대한 리더는 많지만 따르고 싶은 리더는 적은 요즘, ‘덕 있어 외롭지 않은’ 군주였던 유비는 진정한 리더십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은이 : 장쭤야오(張作耀) / 옮긴이 : 남종진 / 출판 : 민음사 / 02-51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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