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설경호원이라고 하면 날렵하게 빗어올린 머리에 검은 양복, 여기에 강인한 인상까지 갖춘 '보디가드'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사설경호원이 인기 직종으로 떠오르며 TV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이런 모습을 한 경호원이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각종 매스컴에 노출되는 횟수에 비례해 사설 경호원에 대한 오해도 그만큼 많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실제 사설경호원의 세계는 과연 어떨까. 이번 주 현장체험은 이런 의문에서 출발했다. [편집자]
지난 12월 29일 오전 10시께 서울 역삼동 ㅅ빌딩 주차장. 쌀쌀한 날씨를 뚫고 검은색 승용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뢰인이 타고 있는 차량이다. 이날 기자가 경호를 맡게 된 의뢰인은 이라크를 포함해 중동 지역을 대상으로 무역업을 하고 있는 ㅅ사 김모대표(52)다.
김대표는 최근까지도 정체가 불분명한 외국인들의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이라크와 한국을 오가며 회사 업무를 총괄하던 그는 지난해 6월 이라크에서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피살된 직후 급히 귀국했다. 하지만 그를 향한 테러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날마다 이동 동선 바꿔주는 것 중요
지난 7월의 일이었다. 김대표가 역삼동 사무실에 머물고 있을 때 회사 비상구를 통해 신원이 불분명한 외국인 2명이 접근한 일이 있었다. 당시 그를 보호하고 있던 경비업체 ㅋ사 경호원들은 직감적으로 이들이 '위험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조용히 다가가 신분확인을 요청하자 그 외국인들은 그대로 내빼고 말았다. 경호원들의 발빠른 대처가 없었더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부터 김대표는 자신의 신변보호를 전적으로 사설 경호업체에 맡기고 있다.
의뢰인이 회사에 도착해서 사무실로 올라가는 시점과, 반대로 사무실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경호에 가장 취약한 순간이다. 김대표를 태운 승용차가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그는 곧바로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사무실로 향하는 동선을 확보하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동선을 파악하는 일은 이날 그의 경호를 맡은 3명 가운데 조명현과장과 기자가 함께 맡기로 했다. 이동하면서 조과장이 슬며시 귀띔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2층 사무실까지 가는 길이 멀지는 않습니다만 모든 위해요소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짧은 거리도 아닙니다. 날마다 이동 노선을 바꿔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비상구를 이용할지, 아니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지 판단하는 것은 사실 경호원의 직감이죠."
조과장은 기자에게 사무실 이동수단으로 어떤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당연히 '엘리베이터'라고 말했다. 어둡고 음습한 비상구 계단보다 엘리베이터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조과장이 씩 웃으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려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마침 엘리베이터는 2대 가운데 1대가 점검중이어서 터무니없이 오래 기다린 뒤에야 겨우 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중 범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개인신변보호 경우 통상 4인이 1조
비상구를 점검한 조과장이 의뢰인을 보호하고 있던 이준규요원에게 별다른 위험이 없다는 무전신호를 보냈다. 무전이 도착하면 김대표 일행은 최대한 신속하게 사무실로 이동해야 한다. 조과장과 기자가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 김대표가 이요원의 보호를 받으며 뛰듯이 사무실로 진입했다. 이것으로 오전 상황은 대략 종료. 나도 모르게 가는 한숨이 터져나왔다.
현장에 투입되기 하루 전날인 12월 28일 오후 기자는 ㅋ사 사무실에 들러 안전교육을 받았다. 하루 체험이지만 가스총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가스총이 일반화돼 있지만 사설 경호원들이 소지하는 가스총은 조금 다르다.
일반 가스총이 '치익'하는 소음과 함께 가스가 분사되는데 반해 이들이 휴대하는 가스총은 실제 권총처럼 화약을 이용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고농축 가스액을 발사하는 방식이다. 발사음도 일반 권총과 똑같다. 일반적으로 5m 남짓한 유효사거리를 기록하는 일반 가스총과 달리 약 20m에 달하는 사거리를 보이며 3m 이내에 있는 사람에게 발사했을 경우 위험할 수도 있다. 가격도 일반 가스총보다 훨씬 비싸 1정에 150만원을 웃돈다.
이날 기자에게 지급된 장비는 공포탄 2발이 장전된 가스총과 무전기였다. 사설 경호원들은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전자 충격봉이나 금속탐지기를 휴대하기도 한다. 양복 상의 왼쪽에 가스총을, 오른쪽에 '리시버'라 부르는 휴대용 무전기를 착용하니 상체가 한결 묵직해진 느낌. 묘한 자신감이 솟아오르는 것이 한편 재밌기도 하다.
개인신변보호의 경우 통상 4인이 1조를 이룬다. 먼저 의뢰인의 사무실 출입문 바깥에 1명이 필요하고 건물 정문과 비상구에도 1명이 배치돼야 한다. 주차장과 건물 외부를 책임지는 요원도 필수다. 나머지 1명은 컨트롤타워로서 의뢰인의 경비 총책임을 맡는다. 경호원끼리는 편의상 사무실 주변을 '1차선', 정문과 비상구 등 건물 내부를 '2차선', 건물 외부를 '3차선'이라 부른다 .오늘의 임무인 김대표 경호의 경우 평상시보다 다소 긴장이 늦춰진 상황이어서 조명현과장과 이준규요원 2명만이 파견됐다. 이요원이 1차선을 맡고 조과장과 기자가 2, 3차선을 함께 책임지기로 했다.
의뢰인을 사무실까지 안전하게 모신 다음 주차장 주변과 비상구 수색까지 마친 뒤 조과장은 1층 로비에서, 기자는 비상구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어두컴컴한 비상구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심심했다. 가끔 비상구를 통해 아래위층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저 사람 뭐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시선이 자꾸 땅바닥에 꽂힌다.
의뢰인과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2차선이나 3차선 경호는 조금 수월한 듯 싶었다. 그러나 조과장은 "가장 최선의 경호는 위험인물이 의뢰인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라면서 "의뢰인이 위험인물과 맞닥뜨렸다면 비록 이를 현장에서 제압했더라도 이미 실패한 경호"라고 말했다.
ㅋ사의 경우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즉각 계약을 해지하고 스스로 물러난다고 했다. 경호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따라서 의뢰인과 조금 떨어져 있더라도 2차선과 3차선 경호가 결코 1차선 경호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상황'이 발생한 것은 점심시간 직후였다. 조과장으로부터 당장 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주차장에 내려가보니 조과장이 검은색 승용차 앞에서 다시 1차선 이요원에게 무전을 보내고 있었다. "3번 가드, TC TC." 'TC'라는 것은 '의심대상 출현'을 가리키는 ㅋ사만의 무선 음어다. 일반인이 들었을 때 유추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단어자체는 특별한 뜻이 없다. 최대한 분명하고 짧게, 이것이 음어의 규칙이다.
상황은 이랬다. 주차장 주변을 수색하던 조과장이 의뢰인이 거주하는 분당에서 본 차량을 이곳 ㅅ건물 주차장에서 찾아낸 것. 누군가 김대표를 분당 자택에서부터 미행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TC 상황이 되면 의심대상을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 당연히 1차선 경계는 더욱 수위를 높인다.
음어의 규칙은 최대한 분명하고 짧게
40분쯤 뒤 40대 중년 여성이 어디선가 나타나 용의 차량에 탑승한 뒤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김대표와 동선이 일치한 모양. 순간 맥이 풀린다. 조과장이 다시 무선을 날렸다. "3번 가드 TC TC, SK SK." 'SK'는 '의심대상 소멸'을 의미하는 음어로 발음은 조금 얄궂지만 '새끼'로 한다.
상황이 종료된 뒤 이번에는 김대표의 외출. 무역업에 종사하는 의뢰인은 평소에도 외출이 빈번하다. 이날은 서울 양재동 ㅎ사를 방문해야 한다. 외출할 때는 사무실에 들어갈 때 동선을 확보했던 방법의 역순으로 진행했다.
조과장이 의뢰인의 승용차 앞에서 대기했고 기자가 2층 사무실에서 내려오며 동선을 확보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가슴 왼편에 잠재워둔 가스총에 다시 한번 손이 갔다. '범죄자의 심리가 되어 어디가 가장 범행에 적당한지 눈여겨 보라'는 경호수칙도 다시금 떠올렸다. 비상구를 통해 주차장에 도착한 뒤 이 요원에게 무선을 보냈다. "GP GP, OZ." '동선이 확보됐다'는 의미의 음어였다.
이날 체험은 정확히 오후 5시에 김대표의 사무실에서 끝났다. 의뢰인은 아직 퇴근 전이었지만 새로운 교대자가 도착했기 때문에 물러나야 했다. '특별한 상황'이 없어 다소 밋밋하긴 했다.
조과장은 "경호요원의 경우 무엇보다 집중력과 체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확히 8시간을 주기로 교대한다"면서 "오늘은 별다른 위험상황이 없었지만 경호원이라면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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