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세 번째 자녀가 18세가 될 때까지 국가에서 양육비용을 부담
하도록 하는 "출산안정법안"이 나온 뒤(한나라당 백승홍 의원 및 35
명 공동발의) 채 한 달도 못되어 출산을 장려하는 또 다른 법안이 한
나라당 이원형 의원에 의해 제안됐다.
이원형 의원의 아동복지법중개정법률안 제안 이유에 따르면, "저출산
율의 주된 이유는 출산비용과 육아비용이므로 50만원 이상의 출산수당
과 만 4세 미만의 아동 1인당 월 5만원의 아동수당을 신설, 자녀 양육
부담을 줄이고 출산율을 끌어올리겠다"는 것. 이원형 의원은 보도자료
를 통해 "출산수당과 아동수당의 지급은 곧 여성의 "삶의 질" 향상과
직결되는 동시에 가족의 질을 업그레이드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1
석 5조의 복지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아이를 더 낳도록 하는 것이 "여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정책인
가? 출산과 양육비용을 지원하는 것이 여성을 위한 정책이라고 주장하
는 것은 출산과 양육의 담당자가 여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차피
여성의 일인데, 그 비용을 조금 덜어주는 것이니 여성을 위한 것이라
는 논리다. 출발부터가 가부장적이다.
결혼촉진, 출산장려… 가부장적 정상가족 틀 강요
이 두 개의 법안은 반여성적이다. 이들 법안의 목적은 단순히 "출산
장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거부하거나 늦추는 여성들로 하
여금 빨리 결혼제도의 틀 안에 들어가도록 하고, 결혼 후에는 노동시
장에 나오기보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가정에 그대로 남아있도록 하
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출산율이 높을수록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낮아진
다. 우리나라와 같이 출산과 양육의 일차적 책임이 여성에게 지워지
고 있고, 출산과 양육을 이유로 한 차별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
실. 그 현실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출산율의 증가는 여성의 경제활
동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출산율 증가가 여성의 취
업을 어렵게 하고, 그 결과 여성의 남성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지속시
킨다는 점에서 이 법안들은 반여성적이다. 또한 여성과 남성간의 불균
등한 경제력은 가정의 민주화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이 법안들이 갖는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는 가부장적 "정상가족"을 유
지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 백승홍 의원이 발의한 "출산안정법안"은 명
시적으로 여성들의 결혼을 촉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의 제4조
는, "모든 국민은 사회의 지속적 발전과 유지를 위하여 결혼과 출산
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돼있다.
이어 제5조에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안정적인 인구의 유지를 위
하여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결혼장려책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김승권 박사팀이 제안하는
정책대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승권 박사는 2002년 "저출산의 사회
경제적 영향과 장단기 정책 방안"에서 "미혼 여성의 가족 및 결혼가치
관의 인식 변화를 위한 홍보, 교육이 강화되어야 함"을 첫 번째 정책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출산율 저하의 직접적 원인이 미혼층의 증대
라는 분석에서 나온 대안이다.
출산안정법에 의하면, 양육 지원금은 "호적법 제49조의 규정에 출생신
고를 함에 있어서 세 번째 이상으로 호적에 기재되는 자녀"에 한해서
만 지급된다. 철저하게 가부장적 정상가족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
타당성 없는 저출산율에 대한 분석
이 두 법안의 내용들은 현실적 타당성도, 논리적 근거도 없다. 예를
들어 이원형 의원이 제안한 법안은 "1.17의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심각한 수준이며, 정부가 아무런 대책 없이 이 문제를 그대로 방
치한다면 향후 노동력 부족, 급진적 인구 고령화 등 국가적으로 큰 손
실을 가져올 것"이라는 진단에 의한 것이다. 이 의원 측은 이러한 진
단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김승권 박사팀의 연구결과에 의한 것이라
고 전한다.
김승권 박사는 현재와 같은 낮은 출산율이 그대로 지속된다면 노동력
부족과 인구의 고령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석은 첫째 향후 테크놀로지 수준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는 것, 둘째 여성과 65세 이상 "노인"의 경제활동참여율이 현재와 같
은 수준일 것이라는 전제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전제는 현실적으
로 타당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들이 출산장려책에 집착하는 이유
50만원의 출산수당과 5만원의 자녀양육비를 지원하면 출산율이 높아
질 것이라는 이원형 의원의 안이나, 셋째 자녀부터 양육비를 지원하
면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백승홍 의원의 법안 그 어느 것도 실증
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출산 양육비 지원이 출산
율을 높일 것이라는 과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 정도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입안된 것일 뿐이다. 왜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실태 조사도 이루어지
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정책"이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정책들
이다.
이원형 의원 측은 이 법안에서 제안한 출산 양육비용으로(가정의 소득
에 관계없이 적용하겠다고 함) 매년 총 2조1천억 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조1천억 원은 2003년 현재 우리나라 전체 사
회보장예산액의 1/5, 노동부 1년 예산의 4배, 여성부 1년 예산의 50
배,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예산의 거의 120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 규모의 예산이면 강력한 차별시정 기구를 만들어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을 해소할 수도 있고, 실효성 있는 육아휴직 서비스를 확대할
수도 있고, 남성의 양육 참여를 촉진하는 다양한 교육과 정책을 실시
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율을 높인다면 지금
과 같이 낮은 출산율에도 노동력 부족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이런 정책 대신 아이를 낳고 기르면 얼마를 주겠다는 식의
정책에 이들 남성정치인들이 굳이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들
을 집안에 머물러 있게 하고, 지금과 같은 가부장적 성별분업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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